《상처가 지도가 되는 순간》 · 프롤로그
《상처가 지도가 되는 순간》을 오늘부터 한 주에 한 편씩 연재합니다. 책의 본문을 차례대로 싣습니다.
일러두기
이 책에 나오는 인물은 특정한 개인의 사례가 아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겪는 일들을 재료로 삼아 지어낸 사람들이고, 이름과 직업과 시간과 장소는 모두 만든 것이다. 상담과 코칭에서 들은 개별 사례를 옮긴 대목은 없다.
한 인물의 이야기에는 여러 사람이 겪은 일이 함께 들어 있다. 어느 대목이 자기 이야기처럼 읽힌다면, 특정한 누군가의 사례여서가 아니라 그만큼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프롤로그
밤 아홉 시 반, 아이를 재우려고 옆에 눕는다. 조금만 누웠다가 일어나야지. 그 다짐이 오늘도 하루의 마지막 기억이 된다.
깨어나 보면 새벽 한 시다. 거실 불은 켜진 채고, 싱크대에는 저녁에 쓴 그릇들이 그대로 있다. 소파에 앉아 휴대전화를 켠다. 눈이 부셔 화면의 밝기를 낮춘다. 오늘 들으려던 강의가 뜬다. 재생 버튼을 누르기에는 늦었고, 그냥 잠들기에는 하루가 아깝다.
오늘도 못 했네.
오늘 한 일은 그렇게 많은데, 못 한 일이 먼저 떠오른다.
아이의 준비물을 잊으면 다음 날 아침부터 일이 생긴다. 자기 공부를 하루 미루면 누구에게도 사과할 필요가 없다. 하루가 모자랄 때마다 무엇을 미룰지는 그렇게 정해진다. 아이가 한 번 열이 나면 일주일이 밀리고,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이 다가오면 회사 일과 돌봄을 넣어둔 일정표를 통째로 다시 짜야 한다. 자기 이름으로 적어둔 계획은 일단 옆으로 옮겨놓는다.
나중에. 조금 여유가 생기면.
그런데 그 나중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마음은 자꾸 먼저 돌아온다.
놀이터에서 몇 해째 아이 이름 뒤의 엄마로 불리다가 문득 제 이름이 듣고 싶어지는 오후. 아이 사진 수천 장 사이에서 자기 얼굴 하나를 찾으려고 사진첩을 오래 거슬러 올라가는 저녁.
내 이름으로 된 일을 해보고 싶다.
소리 내어 말하기는 어렵다. 지금 꺼내기에는 욕심 같고, 나중으로 미루자니 그 나중이 언제인지 알 수 없다. 누구의 엄마로, 누구의 아내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그토록 오래 미뤄온 일을, 왜 아직도 잊지 못할까.
회사에서는 자기 이름이 또렷한 사람에게도 이 마음이 찾아온다. 오래 한 일을 잘해냈고 다음에 맡을 일도 정해져 있는데, 정작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으면 말이 막힌다.
해온 일이 없는 것과, 해온 일에서 다음 선택의 기준을 찾지 못한 것은 다르다.
답을 찾으려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찾아본다. 무엇을 배웠고, 어떤 자격을 갖췄으며,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수입은 얼마나 되는지, 지금의 일과 돌봄을 이어가면서도 가능한지.
어느새 목록에는 해볼 만한 일들이 적혀 있다. 그런데 처음 물었던 것은 하고 싶은 일이었다. 조건에 맞는 일을 찾는 동안, 그 일을 왜 원하는지는 뒤로 밀렸다.
성공한 사람의 경로, 전문가의 지름길, 비슷한 생활에서 먼저 시작한 사람들의 후기. 참고할 지도는 많다. 배우는 동안에는 안심이 된다. 해야 할 일이 분명해지기 때문이다.
다만 그 사람의 출발점과 내 출발점은 다르다. 감당해야 할 생활도, 그 일을 원하는 이유도 다르다. 그 차이를 건너뛴 채 안내를 따라가면, 성실하게 걸었는데도 도착해 보니 남의 집 앞일 수 있다.
지도 앱에는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점 하나가 있다. 길 안내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사는 자리에서는 그 점을 무엇으로 찾아야 할까.
나이와 직업을 적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 몇 글자로는 무엇을 오래 견뎠는지, 무엇을 자꾸 바라게 됐는지 알 수 없다. 같은 일을 하고도 유독 힘들었던 대목, 남들은 지나쳤는데 혼자 오래 마음에 남았던 일도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일들은 대개 지나간 일로 분류해두었다. 다시 떠올리면 아픈 일도 있다. 그런데 현재 위치를 알아보려면, 그중 몇 가지를 다시 펼쳐볼 필요가 있다.

같은 굽은 길에서 사고가 거듭 났다면, 다음 운전자에게 무엇을 알려주어야 할까.
더 조심하라는 당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어느 지점에서 맞은편 차가 보이지 않는지 살펴보면, 반사경을 세울 자리를 찾을 수 있다. 사고가 있었다는 사실에, 그 일이 벌어진 조건을 보태야 다음 길에 쓸 정보가 생긴다.
지나온 시간을 읽는 일도 이와 닮았다. 잘 안됐다는 기억만으로는 다음번에 무엇을 바꿔야 할지 알기 어렵다. 어디까지는 해볼 만했는지, 어느 순간부터 버거워졌는지, 그때 무엇이 없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같은 실패라고 묶어두었던 일에서도 서로 다른 사정이 드러난다.
상처는 덮어두고 싶고, 지도는 펼쳐서 보고 싶다. 그런데 덮어두었던 경험에서 다음 선택에 필요한 단서를 발견하면, 두 말이 한 문장 안에 놓인다. 상처가 지도가 되는 순간이다.
아픈 만큼 성장한다는 말로는 이 일을 설명할 수 없다. 오래 아팠다는 사실만으로 다음 길이 선명해지지는 않는다. 그 경험에서 무엇을 알아냈고, 이제 무엇을 다르게 해볼 수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아팠던 자리만 살피는 것도 아니다. 뜻밖에 기운이 났던 순간, 남들은 번거로워하는데 나는 기꺼이 맡았던 일, 끝난 뒤에도 조금 더 해보고 싶었던 일이 함께 있다. 나를 지치게 한 것과 나를 움직이게 한 것을 나란히 놓으면, 같은 하루에서도 전에는 보이지 않던 차이가 드러난다.
이 책은 그 차이를 따라간다. 지나온 경험에서 원하는 일의 단서를 찾고, 지금의 생활 안에서 작게 해보며 확인하고, 해온 일을 설명하는 말을 고쳐 앞으로 어떤 일에 시간을 쓸지 기준을 세운다.
모두 잠든 집에 혼자 깨어 있는 몇 분. 어두운 창에는 거실 불빛과 소파에 앉은 얼굴이 겹쳐 비친다. 곧 불을 끄고 다시 누워야 한다. 여섯 시간 뒤에는 아침이 온다.
오늘 들으려던 강의는 내일로 넘어간다. 아직 그 강의가 필요한지, 다른 일을 해보고 싶은지도 분명하지 않다. 다만 강의를 결제하게 했던 마음은 남아 있다. 교재를 고르고, 다른 사람의 시작을 찾아보게 했던 마음도.
못 했다는 사실은 여러 번 확인했다.
이제는 무엇을 그토록 해보고 싶었는지 알아볼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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